간추린 오늘의 역사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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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7(충렬왕3)년 고려 승려 육연, 처음으로 강화에서 청기와 제작
충렬왕 3년 5월 임진일에 승 六然을 강화에 보내 유리와를 굽게 하였다.
충렬왕이 僧 六然을 강화도에 보내 유리와를 굽게 하였는데 육연은 廣州의 義安土를 가져다가 黃丹을 많이 사용해서 南商들이 판매하는 것보다 품질과 색상이 아주 뛰어난 유리와를 만들어 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연관시켜 볼 때 사원에는 절을 지을 때 필요한 기와를 굽던 사찰 전용의 瓦窯址가 있었던 것 같다.

1980년 11월 10일부터 22일까지 경주사적관리사무소 학술조사단은 慶北 月城郡 內南面 葺長里 天龍寺 부근에서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기와를 굽던 두 개의 대규모 와요지를 발견하였다. 이곳의 발굴조사 책임자는 당시 천룡사에 기와를 공급하기 위한 사찰 전용의 와요지가 있었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기와가마터는 천룡사만의 건립을 위해서 만들어진 일시적인 것이 아니 라 경주 일대 더 나아가서는 경상도 일대의 사원 건립시에도 기와를 공급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사원이 건립되고 있었으므로 이외의 다른 지역에도 사찰 전용의 기와가마터가 있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기와가마터에서 기와를 생산하는 역할은 육연 같은 승려기술자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사원에 소속되어 있는 사원노비들이 맡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처럼 사원의 기와를 굽는 일 또한 직물류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수공업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1592(조선 선조 25)년 이순신 장군, 전함 80여척 이끌고 여수 앞바다로 출격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했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조선수군은 곧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거북선의 위력을 인정을 받았다.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왔다. 5일 아침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1659(효종10)년 북벌추진중 효종 승하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 등 친청파(親淸派)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김집·송시열·송준길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은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옥사(趙貴人獄事)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군비강화가 추진되기 시작했는데 효종은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 무신을 특채하여 군사양성의 실제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군인사정책은 이전에 훈신·종척(宗戚) 등을 임명하던 예와는 다른 파격적인 것으로 효종의 북벌 군사강화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비강화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은 데다가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북벌을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1659년(효종 10년) 5월초 부터 과로로 인하여 정사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효종은 침을 맞게 된다. 그런데 어의인 신가귀의 진료를 받던 도중 실수로 침을 잘못 놓게 되어 출혈이 발생한다. 출혈을 멈추려 갖은 시도를 하였으나 오히려 출혈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그런데 효종에게 시침하였던 어의는 수전증이 있었다고 한다.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염습을 하는 동안 시신의 부패와 약물의 부작용 등으로 시신이 갑자기 부풀어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일을 두고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염의를 다시 마련하는 한편 새로 관곽을 짤 수 없자, 기존의 관곽에 나무를 잘라 연결하여 이어붙여 새로 재궁을 마련하는 이변이 있었다.

1712(숙종38)년 북한산성 축성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에는 보장처를 강화하자는 안보 전략이 대두했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국에 병력을 고루 배치해 국방 태세를 갖춰야 하지만, 이를 위한 재정이나 군사적인 차원에서 여력이 없자 차선책으로 종사(宗社)만이라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이 강구된 것이다.

종사라 함은 종묘와 사직의 줄임말로, 종묘는 선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요,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단으로 농경 국가의 상징이다. 종묘와 사직은 그 자체가 조선 왕실과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숙종이 “도성민은 바로 나의 적자(赤子, 갓난아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지칭함)인데 어떻게 난리에 임해 보전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백성과 더불어 최후까지 도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은 그 하나의 예라 하겠다.

조정에서는 이같은 도성민들의 욕구를 수용해 새로운 방위체제의 정비를 모색했다. 여기에 왕권 행사를 위한 숙종의 군사력 확보를 위한 정치적 의도, 군영 정비의 필요성 등이 개입하기도 했다. 그 결과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을 중심으로 한 삼군문 도성수비체제가 성립됐으며, 전략적 거점으로 북한산성이 축성됐다.

1702년(숙종 28) 우의정 신완(申琓)은 북한산성을 축성해 도성과 표리(表裏, 겉과 속)로 삼아 도성을 지킨다면 만전의 계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군사들을 중심으로 한때 축성을 위한 공사가 추진되기도 했으나 민생 안정이 시급하다는 명분론에 밀려 축성이 중지되고 도성 수축으로 선회됐다.

도성 수축이 일단락된 뒤인 1709년 다시 축성 논의가 제기돼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와중에서 청나라 예부에서 해적들의 일부가 조선으로 도주해 약탈할 경우에 대비하라는 자문(咨文)이 전해졌다. 숙종은 이를 축성을 위한 주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방비에 빈틈이 없다는 뜻의 금성탕지(金城湯池)라 표현하며 전략적 우수함을 강조했다.

1899(고종36)년 오늘 홍화문(경희궁)-동대문 전차개통
전차운행 맡은 한성전기회사는 고종과 미국인 공동소유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고종이 단독출자한 황실기업이었으나 러시아 등의 간섭 피하려 이근배 김두승 이름으로 회사 세웠다.

1898.9.15 경희궁에서 기공식, 12.25 서대문-홍릉(10km) 공사완료, 당시 명성황후 능이 있어 고종이 홍릉 주장했다고 한다. 일반시민의 전차이용은 1899.5.20.부터, 오전8시부터 오후6시까지 정거장 따로 없어 승객이 손을 들어 전차를 세워 타고내렸다. 5.26 파고다공원앞에서 철로건너던 어린아이가 치어죽는 첫 교통사고가 일어나자 성난 시민들이 전차 부수고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

1949년 육탄 10용사 사건
6.25 전쟁 발발 이전인 1948년부터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은 38선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무력 충돌은 남북이 정식으로 국가를 수립한 1948년 후반기부터 보다 더 격화되었으며 개성도 이러한 충돌이 격화된 곳들 중 한 곳이었다.

1949년 5월 3일, 조선인민군 육군은 이러한 대한민국 육군의 여러 진지를 기습하여 함락했다. 기습 당한 육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즉시 반격했으나 실패했다. 고지에 북한 육군이 방어 시설로 구축한 토치카를 제압하지 않고는 반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월 4일 낮 12시, 박창근 보병하사가 먼저 수류탄을 들고 토치카에 접근하여 토치카 하나를 파괴했다.

이와는 별개는 한국 육군은 토치카를 파괴하려는 특공대를 조직했고 81mm 박격포 포탄과 수류탄을 연결하여 급조한 폭탄을 각자 들고 최대한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접근하여 토치카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즉 자폭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자폭을 명시하진 않았지만 화력 엄호 없이 보병들만 폭탄을 들고 돌진하여 토치카를 파괴하라는 건 사실상 자폭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사단 제11연대 하사관교육대 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가 제일 먼저 자원하고 뒤이어 자원한 특별공격대 8명까지 합해 총 9명은 이 날 오후 14시 토치카로 접근했고 북한 육군의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토치카에 돌격하여 자폭했다. 그들의 자폭 공격으로 북한 육군 토치카 상당수가 무력화 됐기 때문에 한국 육군은 즉시 반격하여 송악산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군인 정신의 표상으로서 추앙받은 이 군인들은 1950년 12월 30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받으며 서부덕 이등상사는 중위로, 나머지 9명은 일등상사로 특진했다. 전후에도 국군에서 육해공군 안 가리고 정훈·정신 교육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존재가 되었다. 이 군인들이 소속된 제11연대의 부대명은 아예 '육탄부대'가 되었다.

이 군인들을 다루는 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가 제작되기도 했고 육탄10용사를 기리는 군가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매년 이 군인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도 열리며 이 군인들의 출신지에는 충혼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지금도 1사단 예하 부대 상당수는 부대 입구에 육탄10용사 관련 문구를 써 넣는다.

병점역과 동탄신도시 일대를 잇는 도로 중 하나는 이름부터 '10용사로'이다. 물론 이것은 도로가 지나가는 반송동에 있는 육탄10용사기념공원에서 따온 것이지만, 용사 중 한 명인 김종해가 동탄 출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이 군인들이 자폭 공격한 송악산 일대는 휴전 후 북한령으로 넘어가면서 현재는 미수복 지역이다.

현재 매년 5월 4일마다 파주 통일 공원에서 육탄10용사 추도식이 열린다.

1956년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 급서
제3대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1956년 5월 5일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다. 연일 강행군한 강연과 유세 등이 그 원인이었다.

해공 신익희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1945년 광복 때까지 일관되게 임시정부를 지킨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2차 환국 때 귀국해 초기에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을 선도했지만 곧 임시정부세력의 남북협상론보다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정(單政) 불가피론을 수용해 이승만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이승만과 제휴해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쏟은 신익희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2대 의장에 오르면서 임정계가 주축을 이룬 한국독립당 동지들과는 더욱 멀어졌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는 경기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됐으며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돼 대통령 이승만과 호흡을 맞춰나갔다.

이후 1948년의 5·10총선을 거부한 임시정부세력과 한독당 인사의 기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승만과도 멀어졌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의 한강백사장 연설에는 30만명이 운집하는 등 신익희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신익희의 유해가 경무대 근처 효자동 자택으로 운구되던 중 흥분한 시민들이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로 돌진하면서 경찰과 충돌해 7백여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대통령선거 결과 이승만이 재집권했지만 신익희의 추모표가 전국적으로 185만 8,200표(전체 투표자수900만명)나 나왔으며, 서울에서는 이승만의 지지표 20만표보다 많은 28만여표나 나왔다.

1982년 대검 이철희 장영자를 외국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1982년 5월 4일 거액의 어음사기사건으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장영자와 남편 이철희를 구속했다.

권력의 후원을 내세워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6,404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어음사기행각을 벌인 이들 부부는 대화산업이란 회사를 차려놓고 자금이 필요한 기업을 대상으로 연리 20-22%로 비교적 낮은 금리에 2년 거치 3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견질어음을 대출액의 3-4배 요구, 이를 다시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또 다른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등 거액의 사채놀이를 해왔다.

건국후 최대규모의 금융사기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사회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켜 공영토건, 일신제강 등의 기업이 도산하는가 하면 조흥은행장, 상업은행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 등 30여명이 구속됐다. 또한 이 파동으로 국무총리 등 4부장관이 모두 해임됐다.

재판결과 이철희, 장영자 부부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에 미화 40만달러, 일화800만엔 몰수, 추징금 1억6,254만원이 선고됐다.

2004년 산악인 엄홍길, 히말라야 8000m급 15좌 정복에 성공
세계 최초 히말라야 15개 봉우리 오른 엄홍길씨 거센 바람과 희박한 산소, 바닥난 체력과 사투를 벌인 끝에 8505m 얄룽캉 고지에우뚝 선 엄홍길(43・한국외대 중어과 3년) 씨의 눈앞에 더 이상 오를 곳은 없었다. 2명의 셀파만이 옆에서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다. 이와 동시에 전세계 60억인구 가운데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한 그를 넘어설 사람도 없었다.

지난 5일 오후 6시23분(한국시각), 엄씨가 세계 최초로 8000m이상의 히말라야15개 봉우리를 오르며 세계 등반사의 새 역사를 쓰는 순간이었다. 인류의 역사가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등반가 12명이 히말라야 14좌 등정 성공이라는 이름을남겼지만 15좌 등정은 그가 유일하다. 엄씨 개인으로서는 2000년 7월 험난하기로이름난 케이2(8611m)를 등정한 뒤 3년 10개월만의 쾌거다.

한국 외국어대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엄씨가 오른 얄룽캉봉은 지난 1991년 이후등정에 성공한 원정대가 없는 험난한 봉우리이다. 1988년 엄 대장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올랐던 연맹의 이의대 사무국장(43)도 “대개8000m급 봉우리 두세개 등정하면 정신적, 체력적으로 힘이 떨어져 더 이상의등반을 포기하는 점을 감안하면 엄 대장의 이번 성공은 높이 평가할 일”이라고말했다.

엄 대장을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은 이번엔 11명의 등반대원 모두 큰 탈없이건강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까지 8명의 동료대원이 ‘세계의 지붕’을 무덤삼으며 스러져가는 모습을 눈물을 삼키며 지켜봐야 했다. 지난해 가을에도 그는 로체샤르(8400m)에 황선덕, 박주훈 두 대원을 묻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엄 대장은 그의 히말라야 도전사의 마지막페이지가 될 로체샤르 정복을 이번 가을로 계획하고 있다. 전무후무할 16좌 등정을노리는 것이다. 8000m 이상의 봉우리가 히말라야에 16개 뿐이라는 것이 엄씨는아쉽다. 엄홍길이라는 ‘전설’과의 대결을 앞두고 로체샤르는 이미 산자락을여미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5년 여의도서 180평 규모 지하벙커 발견
서울시는 5일 "여의도에 대중교통 환승 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지난달 중순 현지 조사를 하다 옛 중소기업전시장 앞 도로 아래에서 180여평 규모의 지하 벙커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최진호 시 교통개선추진단장은 "평소 지하로 내려가는 출입구가 있어 공동구(상.하수도와 전화 케이블 등이 매설된 지하터널)로 생각했는데 시설 관리자도 없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내시경을 넣어보고 벙커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시는 이 시설이 지하 시설물 도면 등에 기록돼 있지 않은 점 등으로 미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여의도에서 열린 `국군의 날" 행사 때 대통령 등 요인들의 유사시 대피용 방공호로 추정하고 있다.

최 단장은 "환승 센터를 지으면서 편의시설로 활용할 만한 공간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환승 센터 자리 바로 아래에서 벙커가 발견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지금 있는 화장실 등은 그대로 사용하면서 교통카드 판매소와 매점 등을 만들어 환승 센터 이용 시민들의 편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9년 한국해군, 해적에 쫓기던 북한 상선 구조
소말리아 해역에서 우리 선박 호송 업무를 맡고 있는 청해부대 문무대왕함이 2009년 5월 4일 오전 해적의 공격 위기에 처한 북한 상선을 구조했다.

이날 문무대왕함이 아덴항 남방 37㎞ 해상에서 북한선적 6천399t급 화물선 ‘다박솔(DABAK SOL)’호가 해적선으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긴박한 구조신호를 포착하고 링스헬기를 긴급 출격시켜 50분만에 해적선을 퇴치했다.

합참에 따르면 한국시각으로 이날 오전 11시 40분쯤 5차 호송임무를 마치고 아덴항 인근 국제권교통항로 상에서 감시와 정찰활동을 하던 문무대왕함에 “해적으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북한 다박솔호의 긴급 구조 신호가 포착됐다. 당시 다박솔호는 아덴항 남방 37㎞, 문무대왕함으로부터 96㎞ 거리였다.

문무대왕함은 신호를 포착한 지 10분 만인 11시 50분쯤 링스 헬기를 출동시켰고, 헬기는 30분만인 12시 20분쯤 다박솔호 상공에 도착했다. 해적선이 다박솔호를 불과 3㎞ 거리까지 추격해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링스헬기는 위협 기동을 하는 동시에 탑승하고 있던 저격수들이 해적선을 향해 사격자세를 취하자 해적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결국 링스헬기가 현장에 도착한 지 10분만인 낮 12시 30분쯤 해적선은 항로를 완전히 변경해 달아났고, 헬기는 해적선이 북한 선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위협기동을 계속했다. 링스헬기는 오후 1시30분 문무대왕함에 복귀하기 전까지 110분간의 작전 비행을 통해 북한 상선을 지켜냈다.

당시 해적 모선에는 상선에 접근할 수 있는 자선은 물론 사다리까지 비치돼 있어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어도 북한 상선이 해적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다박솔호는 철강을 싣고 이집트에서 홍해를 지나 인도로 향하던 길이었다.

해적선이 멀리 도주하고 나서도 문무대왕함은 쫓기느라 항로를 이탈했던 다박솔호와 3차례에 걸친 교신으로 항로를 제대로 찾도록 안내하면서 보호하는 등 끝까지 임무를 다했다. 북한 상선은 통신망을 통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몇 차례 거듭했으며 “우리를 더 보호하겠습니까” “좀 잘 지켜주십시오”라는 말로 고마움을 표했다고 합참은 전했다.

피랍위기에 처한 선박은 국적을 불문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하도록 되어 있는 유엔해양법에 따라 진행된 이날 우리 군의 작전은 한국이 북한상선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준 첫 사례로 기록됐다.

2019년 북한 원산 호도반도에서 발사체(신형 전술유도무기) 발사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이 4일 강원도 원산 호도반도 일대에서 '단거리 발사체' 수발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이날 "북한은 오늘 오전 9시 6분경부터 9시 27분경까지 (강원도) 원산 북방 호도반도 일대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불상 단거리 발사체 수발을 발사했다"고 전했다.

합참은 앞서 북한이 쏜 기종을 '단거리 미사일'로 발표했으나 40여분 만에 '단거리 발사체'로 수정했다.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발사는 지난달 17일 '신형 전술유도무기' 이후 17일 만이다.
이번에 발사된 발사체는 동해상까지 약 70km에서 200km까지 비행했으며, 추가 정보에 대해서는 한미가 정밀분석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현재 우리 군은 북한의 추가발사에 대비해 감시와 경계를 강화한 가운데 한미 간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만반의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발사한 기종이 미사일이라면 2017년 11월 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발사 이후 1년 5개월여 만이다.

앞서 북한은 지난달 1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신형 전술유도무기를 사격 시험했다. 미국은 북한의 전술유도무기 발사 이후인 4월 18, 19, 29일 수도권 상공에서 이례적으로 RC-135W(리벳 조인트) 정찰기를 띄워 대북 감시에 나섰다.

북한은 그간 원산 호도반도에서 단거리 미사일, 대구경방사포 등을 시험 발사해왔다. 2014년 8월 14일에는 호도반도에서 '전술 로케트'를 시험발사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 로켓은 200㎞를 비행했다.


4일 북한 원산 호도반도에서 신형 전술유도무기가 발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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